한국 고대근동학의 저변 확대와 진지한 논의의 장을 마련하고자 발간되는 ⟪한국고대근동학 노트⟫ 제8호가 독자 여러분을 찾아 뵙게 되었다. 이번 호에서도 고대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문명의 다양한 주제를 다룬 총 6편의 글이 수록되었다. 특히 이삭 박사께서 고대 이스라엘 인장을 주제로 새롭게 연재에 참여해주셔서, 그에 대한 깊이 있고 흥미로운 논의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제임스 그린버그의 책 ⟪레위기 어톤먼트의 새 조망: 키페르의 의미와 목적 재고⟫에 대한 서평을 기고해주신 성기문 박사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번 호에 실린 각 글의 주요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김구원 박사는 함무라비 법전이 단순한 성문 실정법이 아니라 왕의 판결을 정리한 사례집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함무라비 법전이 실제 법정에서 법문으로 인용되지 않았고, 함무라비 법전 내에 포괄성이 부족하며, 특정 사례들을 조금 추상화해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함무라비 법전은 왕의 통치 원칙과 정의를 선전하는 도구로 활용되었고, 아울러 왕권을 정당화하고 후대에 본보기를 제공하기 위한 문서로 제작되었다. 이런 점에서 함무라비 법전은 단순한 법률집이 아니라 왕의 통치 철학을 담은 기념비적 성격이 강함을 논의하고 있다.
유성환 박사는 기존의 연재를 잠시 멈추고 특별 기고를 보내왔다. 아켄아텐의 종교개혁을 다루는 이 글은 장로회신학대학교 학술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내용을 조금 수정한 것으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켄아텐(아멘호텝 4세)은 이집트 제18왕조의 파라오로서, 고대 이집트에서 전례 없는 급진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한 인물이다. 그는 전통적인 다신교적 신앙을 버리고 태양원반 아텐(Aten)을 유일한 최고 신으로 숭배하는 아텐 신앙(Atenism)을 도입했다. 이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그는 수도를 기존의 테베에서 아케트아텐(Akhetaten)(현대의 아마르나)으로 이전하고, 예술과 건축 양식에서도 획기적인 변화를 시도하며 수세기 동안 유지되던 전통과 단절했다. 그러나 아켄아텐이 사망한 후 그의 종교개혁은 급격히 폐기되었으며, 전통적인 다신교 체제가 즉시 복원되었다. 기존 신들의 신전이 재개방되고 사제들이 다시 권력을 되찾았으며, 아켄아텐이 건립한 아텐 신앙 관련 기념물들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심지어 그의 이름조차 왕의 연대기에서 삭제되었으며, 후대 통치자들은 그의 개혁을 완전히 무시하려 했다.
유성환 박사에 따르면, 아켄아텐의 개혁에 대한 학자들의 다양한 분석과 평가들이 존재한다. 일부 학자들은 그의 아텐 숭배를 인류 최초의 일신교적 신앙 사례로 간주하며, 그를 유일신 개념의 선구자로 평가한다. 반면 그의 개혁을 종교적 신념이 아닌 정치적 동기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예를 들어, 그는 강력한 아문(Amun) 신관단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더욱 중앙집권화하려 했다는 분석이 존재한다. 또한 아켄아텐의 종교개혁은 현대 사상가들에게도 흥미로운 연구 주제가 되었다. 특히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아켄아텐의 일신교적 개념이 모세(Moses)와 유대교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모세가 아텐 신앙을 이집트에서 히브리 전통으로 옮긴 사제였을 수도 있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윤성덕 박사는 지혜 문헌 연재를 계속한다. 이번 호에는 논쟁 문학과 지혜문학의 요소를 갖춘 ⟨니싸바와 밀⟩이라는 ‘바빌리’(=바빌론)의 작품을 분석한다. 니싸바는 원래 글쓰기와 풍요의 여신이었지만 후대에는 곡식의 여신으로 남게 되었으며, 본문에서는 밀과 논쟁하는 역할을 한다. 작품의 구조는 찬양과 기도로 시작하여, 밀이 니싸바에게 풍요의 질서를 어지럽혔다고 불평하는 장면으로 전개된다. 논쟁이 진행되면서 신들의 개입과 세계의 질서가 다시 정립되는 과정이 묘사되며, 마지막은 니싸바에 대한 찬양으로 마무리된다. 본문에서 다양한 하위 신들의 역할이 강조되며, 기도와 불평을 통해 신과 인간이 소통하는 방식이 드러난다.
특히 윤성덕 박사는 이 작품에 포함된 신적 존재에 대한 흥미로운 개념들에 집중한다. 예를 들어, ‘좋은 것’이라는 여성적 존재, 신들의 권위를 상징하는 ‘광채’, 인간이나 동물의 형상을 가진 신 개념, 그리고 니싸바를 ‘한 분이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하는 표현들이 주목된다. 또한 니싸바 여신의 신격이 확대되면서 천체의 빛과 점성술, 폭풍우까지 지배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런 내용은 바빌론 문학이 단순한 신화적 이야기에서 벗어나, 신의 권능과 세계 질서를 논의하는 신학적 ·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주원준 박사도 지난 호에 이어 ⟨아트라하시스 이야기⟩를 분석한다. 이번 연재에서는 세 번째 토판인 홍수 이야기를 번역하고 해설한다. 엔키로부터 예지몽을 받은 아트라하시스가 신과 인간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하는 과정을 상세히 서술한다. 꿈을 통해 신과 인간이 소통하는 방식은 고대근동뿐 아니라 구약성경에서도 발견되며, 특히 벽(갈대벽)이 신의 계시를 전달하는 매개체로 등장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방주의 건조 명령과 설계가 제시되는데, 방주는 기존의 상식과 달리 정사각형 혹은 원형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방주의 의미는 단순한 탈출 수단이 아니라 물질적 소유를 버리고 새로운 생명을 선택하는 종교적 상징성을 지닌다.
이후 본문에서는 아트라하시스가 방주를 짓고 다양한 동물을 실으며, 방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사회적 계층을 초월한 연대 작업이 이루어진 점이 강조된다. 본격적인 홍수의 징조가 나타났을 때 방주의 문을 닫는 행위가 단수형과 복수형으로 구별되는데, 이를 통해 방주에 함께 타지는 않았지만 건설을 도운 사람들이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주원준 박사는 기존의 길가메시 서사나 창세기의 홍수 이야기와 비교해 신과 인간의 관계, 홍수의 의미, 방주의 형태에 관한 다양한 통찰을 제공하며, 홍수 신화가 단순한 재앙 서사가 아니라 고대 종교와 사회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중요한 문헌임을 보여준다.
이번에 새롭게 합류한 이삭 박사는 앞으로 이어질 연재에서 고대 이스라엘 지역의 항아리 인장들을 다룬다. 고대의 저장 항아리는 기름, 와인, 곡물 등을 보관하고 운반하는 필수적인 용기로, 유다 왕국에서는 이러한 항아리 손잡이에 인장을 찍어 경제적 · 행정적 체계를 운영했다. 이 연구는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 등장한 다양한 유형의 인장들—엄지손가락 인장, 라멜렉(lmlk) 인장, 동심원 인장, 로제트(rosette) 인장, 모짜(mwṣh) 인장, 사자(lion) 인장, 예후드(yhwd) 인장, 예루살렘(yršlm) 인장—의 특징과 변화를 추적한다. 초기에는 단순한 상징이 사용되었지만 점차 왕실 소유 표시와 도시명을 포함하는 등 정교한 행정 도구로 발전했다. 이러한 인장들은 신앗시리아, 신바빌로니아, 페르시아, 헬레니즘 제국 등의 지배하에서 변화하며, 유다 지역의 정치적 · 경제적 상황을 반영하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이 연구는 문헌 기록이 부족한 시대의 유다 왕국 및 예후드 속주의 경제 · 행정 체계 및 권력 구조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성기문 박사는 제임스 그린버그의 저서를 비평적으로 소개한다. 성기문 박사에 따르면, 고대 이스라엘과 기독교 역사 속에서 키페르(kipper)는 전통적으로 ‘유화하다(propitiate)’ 또는 ‘속죄하다(expiate)’로 번역돼왔으며, 이후에는 ‘정화하다(purify)’라는 새로운 해석이 등장하면서 학계에서 논쟁이 지속되었다. 그린버그는 기존의 다양한 해석을 ‘오염과 정화’, ‘혼합’ 그리고 ‘관계성’이라는 세 가지 범주로 체계적으로 정리했으며, 특히 제이콥 밀그롬(Jacob Milgrom)의 오염 및 정화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는 성소가 죄로 인해 오염되는 것이 아니라,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요소라고 보며, 키페르는 성소의 정화가 아닌 관계 회복의 역할을 한다는 입장을 제시한다. 성기문 박사는 그린버그의 연구가 현대 키페르 해석에 대한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다.◼
▪ ⟪한국고대근동학 노트⟫ 제8호를 펴내며 — 편집위원장 김구원 · 3
[ 특별 연재 ]
▪ 함무라비 법전 이야기 ①: 함무라비 법전은 실정법이 아니었다 — 김구원 · 9
▪ 아켄아텐의 ‘종교개혁’과 그 여파 — 유성환 · 25
▪ 바빌리 사람들의 지혜 ⑧: 니싸바와 밀 — 윤성덕 · 62
▪ 아트라하시스 이야기 ⑧ — 주원준 · 79
▪ 고대 남부 레반트 유다 왕국/예후드 속주의 행정 체계 사례: 저장 항아리 인장들의 발전사 ① — 이삭 · 99
[ 고대근동학 리뷰 ]
▪ 제의적 키페르 동사 의미 연구의 대전환 — 성기문 · 111
제임스 그린버그, ⟪레위기 어톤먼트의 새 조망: 키페르의 의미와 목적 재고⟫ 서평
학회 신간 안내 · 119
학회 가입 안내 · 120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의 핵심 문헌과 역사, 문화를 한국 독자들에게 널리 소개하려는 마음들이 모여 시작된 ⟪한국고대근동학 노트⟫도 제7호 발간과 함께 어느 덧 두 돌을 맞이한다. 지난 2년간 이 일에 한 뜻으로 참여한 다섯 분의 활동과 노력으로 고대근동의 역사와 문화가 한국의 교양 교육에서 작은 지분을 얻게 된 듯해 뿌듯하다. 수고해주신 다섯 분 필진에게 큰 감사를 드린다. 특히 창간호부터 총 여섯 권의 편집을 책임진 윤성덕 박사의 수고에 감사를 드린다. 문헌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윤 박사의 섬세함과 꼼꼼함은 이번 호부터 편집의 책임을 이어받은 필자에게 큰 귀감이 될 것이다.
이번 호에는 모두 네 편의 글을 실었다. 지난 호들에 비해 한 편이 부족한 이유는 김아리 박사가 개인 사정으로 당분간 글을 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음 호부터는 연세대학교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인 이삭 박사가 새로운 필진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유성환 박사는 이번 호에서도 고대 이집트의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특히 제1중간기 귀족 분묘에서 목격되는 조형예술 양식의 변화를 설명한다. 고왕국 이후 중앙집권 권력이 약화되면서 지방 관리들의 힘이 강해지자 전국에 그들의 분묘가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 분묘에서 지방색이 매우 강한 조형예술 작품들이 목격된다. 예를 들어, 추모실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장례석비는 왕실 양식의 제약에서 벗어나 지역 장인들의 실험 정신을 반영한다. 인물 묘사에서 남녀 가릴 것 없이 가슴이나 배의 지방층이 부드러운 곡선이 아니라 뾰족하거나 각진 모습으로 처리되곤 했다. 이런 변화가 예술의 발전인지 퇴보인지는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윤성덕 박사는 메소포타미아의 지혜 문헌인 ⟨위성류 나무와 대추야자 나무⟩의 ‘중앗슈르’ 시대 사본과 ‘슈메르’ 사본을 번역하고 해설한다. 이 문헌의 신화적 서론에 따르면 신들이 세상을 창조했을 때 인간을 다스릴 왕도 함께 세웠다. 이어지는 본론은 그 왕이 왕궁에 정원을 조성하고 잔치를 베풀었을 때 정원의 나무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다루고 있다. 위성류 나무와 대추야자 나무는 자기가 상대보다 나은 이유를 6회에 걸쳐 논쟁한다. 예를 들어, 대추야자 열매가 자신이 많은 사람들의 양식이 된다고 주장하면 위성류 나무는 자신의 목재로 각종 도구와 신상이 만들어진다고 반박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이야기가 작성된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이유들이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런 문학이 정말 ‘지혜’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세태에 대한 풍자인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주원준 박사는 지난 호에 이어서 계속 ⟨아트라하시스 이야기⟩를 번역하고 해설한다. 이번 호에서는 신들의 회의를 이끄는 엔릴이 인간에게 파괴적 홍수를 내릴 것을 명령하는 과정과 그에 반대하는 엔키의 노력을 다룬다. 주 박사는 엔릴과 엔키의 인물 대조에 주목한다. 엔릴은 신들의 회의의 수장으로 언제나 강한 실천력으로 상황을 주도하면서 때로는 갈등도 마다하지 않는 성격이라면, 엔키는 보다 순종적이면서도 지혜로운 신으로 그려진다. 이 때문에 엔키는 신들의 결정에 노골적으로 반대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인간을 살릴 수 있는 묘책을 생각해낸다. 이 과정에서 형제 신들이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것은 덤이다. 필자에게는 엔릴과 엔키의 대조적 인물상이 서로 다른 두 가지 ‘리더십’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인상이 든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필요한 리더는 어떤 모습일까?
김구원 박사는 이번 호에서도 고바빌론의 왕 함무라비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특히 함무라비 왕의 마리 정복 과정과 당시의 외교 문서에 담긴 함무라비에 관한 두 가지 일화를 통해 함무라비의 인간적인 측면에 집중한다. 그가 남긴 ⟨법전⟩ 덕분에 함무라비는 오늘날 보통 ‘정의의 왕’으로 이해되지만, 그를 곁에서 모신 관료들과 장군들과 그의 궁전에 파견되었던 외교관들의 눈에 함무라비 왕은 강한 자기애를 가진 무서운 실용 군주였다. 그는 자기 이익을 위해 기꺼이 정의의 원칙을 버린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그의 정복 전쟁을 도왔던 짐리림(Zimri-Lim)과의 신사 조약을 어기고 동맹국 마리(Mari)를 침공해 멸망시켰으며, 불공정한 대우에 항의하는 바빌론 주재 타국 외교관들을 협박하고, 반역한 부하와 그에 동조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처단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혼네’와 ‘다테마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인용할 때마다 사람은 겉과 속이 똑같은 인간을 이상적으로 생각하지만, 어쩌면 두 가지 서로 다른 가면을 적절하게 갈아 쓰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Enjoy the feast!◼
▪ ⟪한국고대근동학 노트⟫ 제7호를 펴내며 — 편집위원장 김구원 · 3
[ 특별 연재 ]
▪ 함무라비 이야기 ②: 인간 함무라비 — 김구원 · 7
▪ 고대 이집트의 예술 ⑦: 제1중간기 — 유성환 · 20
▪ 바빌리 사람들의 지혜 ⑦: 위성류 나무와 대추야자 나무 ② — 윤성덕 · 30
▪ 아트라하시스 이야기 ⑦ — 주원준 · 45
학회 신간 안내 · 60
학회 가입 안내 · 62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는 언제나 시끌시끌합니다. 날씨가 덥고 건조해서 그런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거리낌 없이 솔직한 얼굴로 얼버무리거나 예의를 차릴 생각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내뱉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두 사람이 모여 대화할 때 세 가지 의견이 나온다고 말합니다.
서로 같은 것을 욕심내지 않는다면 이런 분위기에서 놀라운 창조력이 발휘되기도 하지만, 경쟁하거나 대립하는 관계라면 사태가 심각해집니다. 양측이 신뢰하는 중재자나 강제력을 가진 제삼자가 없다면 불같이 타오르는 사람들을 말리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생긴 민족이나 나라가 서로 대립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지금도 뉴스를 보면 범죄가 분명한 폭력 행위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과 이런 자들을 지상에서 뿌리 뽑겠다고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는 사람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들 뒤에는 폭력이나 전쟁에 가담하지 않았는데도 모든 재산과 사회적 지위는 물론 목숨까지 빼앗기는 피해자들과, 그럴듯한 대의 뒤에 숨어 정치적 이해관계를 챙기는 정치인들을 비판하며 매주 광장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립적인 위치에서 중재하거나 공평한 규칙을 강요하는 세력은 어디에도 없고, 바다 건너 안전하고 안락한 거실에 앉아 날카로운 혀로 변죽을 올리는 사람들 뿐입니다.
뉴스에서 보는 것보다 상황이 심각한 이유는 서아시아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온 시간이 매우 길다는 데 있습니다. 김구원 박사가 새로 시작한 연재를 보면 지금부터 3,000~4,000년 전에 이라크 남부에 살던 사람들이 서로 동맹을 맺었다가 배신하고 또 다른 세력과 힘을 합쳐 앞날을 도모하던 이야기와, 그런 상황을 함무라비 왕이 어떻게 이용했는지 구경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역사는 함무라비처럼 끈질기게 견디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의 손을 들어주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아리 박사는 이번에 고대 예술 작품이 아니라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미술 작품에 나타난 바빌리의 왕 네부카드네자르의 모습을 조명합니다. 위대한 정치인에 관한 이야기는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체처럼 글과 그림을 넘나들며 새롭게 태어나고 자기와 닮았지만 또 다른 세대를 생산합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세계는 구석구석에 무엇인가 끈적끈적한 것이 끼어 있고 그런 면에서 예술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유성환 박사는 계속해서 고대 이집트 장례 관습과 다양한 미술 작품을 생산하던 원리를 자세하게 안내하고 보여줍니다. 죽은 뒤에 가게 되는 세계를 상상하며 건축물을 짓고 다양한 글과 그림으로 장식했던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해답 없는 이 세상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발견했던 것인지 궁금합니다.
윤성덕 박사의 바빌리 지혜문학 연재는 이번에 논쟁 문학으로 넘어가 위성류 나무와 대추야자 나무가 벌이는 토론을 소개합니다. 나무와 나무가 논쟁을 벌인다면 동화나 우화처럼 들리는데,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소소한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습니다. 힘 있는 자들은 국가와 영토 확장과 전 세계 위에 빛나는 영광스러운 왕관을 이야기하지만, 매일 들에 나가 나무를 가꾸고 농기구를 만들며 옷을 만들어 입고 시장에 나가는 사람들은 그냥 자기를 조용히 내버려두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원준 박사 역시 아트라하시스 연재를 계속하면서 고대 서아시아 신들이 인간에게 내린 다양한 재앙들에 관해 논의합니다. 만약 농사짓고 바느질하던 사람들에게 정치인이 필요했다면 그것은 혼자 힘으로 맞설 수 없었던 홍수나 기근 등 자연재해가 닥쳐온 때였을 것입니다. 경험에 비춰 미리 준비하고 재해가 발생했을 때 효과적으로 인력을 동원해 피해를 복구하려면 누군가 지도자 역할을 해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화가 기억하는 그 옛날에는 지혜롭고 신들 앞에서 겸손한 아트라하시스가 있었는데, 문명이 훨씬 더 발전한 현대에는 누가 그 역할을 해줄지 한숨이 나올 뿐입니다.◼
▪ ⟪한국고대근동학 노트⟫ 제6호를 펴내며 — 편집위원장 윤성덕 · 3
[ 특별 연재 ]
▪ 함무라비 이야기 ①: 함무라비의 정복 전쟁 — 김구원 · 7
▪ 고대근동의 어느 미친 왕의 이야기 — 김아리 · 22
▪ 고대 이집트의 예술 ⑥: 고왕국 시대 귀족 분묘의 부조 — 유성환 · 31
▪ 바빌리 사람들의 지혜 ⑥: 위성류 나무와 대추야자 나무 ① — 윤성덕 · 45
▪ 아트라하시스 이야기 ⑥ — 주원준 · 66
학회 신간 안내 · 88
학회 가입 안내 · 89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구석이 있다. 좋게 말하면 자신을 존중하며 긍정적으로 삶을 대하는 태도를 기를 수 있는 출발점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자기 주변에 같이 사는 사람들과 자연계를 자신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재단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이유가 된다. 고대사를 공부할 때 옛날 옛적에 살던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주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보고 혀를 찰 때가 있는데, 내가 그 사람의 자리에 앉았다면 다르게 결정했을 것이라고 쉽게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꼭 이기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싫지만 올해부터 ⟪한국고대근동학 노트⟫를 1년에 3회(3, 7, 11월) 발행하기로 했다. 필자들이 작년에 네 편의 글을 발표하면서 여러모로 크게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노트를 읽어주시는 독자 분들께 필자들의 이기적인 결정을 용서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이번 호에서 김아리 박사는 ‘고대근동의 신상’에 관해 설명한다. 고고학 발굴을 통해 신상을 발견한 예가 없어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기록 자료와 간접적인 고고학 유물들을 분석해 신상을 제작하고 그 안에 신의 임재를 받는 방법을 자세히 논의한다. 신상과 관련된 주요 제의와 신전 시설은 물론 관련된 역사 사건도 예로 들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신이 인간을 필요로 하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인간은 신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신상은 결국 인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제작된 물건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인들도 아직 신상을 만들거나 유형 또는 무형의 신상 대체물을 만들어 섬기고 있으니 전통의 힘은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유성환 박사는 ‘고왕국 시대 귀족의 인물상’을 소개하는데, 마스타바라는 매장지 안 추모실에 설치해 망자의 혼(카ka)이 깃들도록 하는 조각상이었다. 망자의 혼은 이 인물상에 임재해 살아 있는 자들이 시행하는 의례에 동참하고 봉헌물을 흠향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이나 하인들의 조각상도 만들고, 망자의 인물상도 지위에 따라 여럿을 만드는 등 다양하게 변하는 모습도 논의했다.
망자가 자신을 위해 인물상을 만들어주는 후손들을 반갑게 여길지는 직접 확인할 길이 없지만, 제사와 음식을 바치고 살아 있는 자의 소원을 어떻게든 들어주기 바라는 태도는 모든 종교의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결국 신상과 인물상은 매우 비슷한 의도로 제작하는 셈이다.
윤성덕 박사는 ⟨샤마쉬 찬양시⟩ 마지막 부분을 번역하고 주해한다. 하늘에 높이 떠서 모든 것을 아는 태양신이 운명이 흘러갈 일을 인간에게 징조로 알려주며, 인간은 정해진 축일에 음식과 술을 준비해 정성스럽게 신을 섬긴다. 선인과 악인은 물론 천사에 해당하는 하위 신도 샤마쉬를 섬기니, 그는 시간과 계절을 주관하며 세계를 운영하는 최고의 신이라고 노래한다.
이 아름다운 찬양시를 뒤집어 읽으면 기도자가 무엇을 바라는지 아주 쉽게 드러난다. 태양신 샤마쉬를 이렇게 놀라운 능력으로 전 세계를 운영하는 최고의 신으로 떠받드는 이유는 그가 징조를 통해 기도자의 운명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음식과 술을 바치며 그 신을 즐겁게 한다면 정해진 운명조차 고쳐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기도자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주며 노래를 부르는 자는 직업 종교인이며 전문 분야가 있는 지식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주원준 박사는 ⟨아트라하시스 이야기⟩를 이어간다. 사람이 다음 세대 사람을 낳는 때가 지나자 인간이 신들을 화나게 만들었고 엔릴 신이 인간에게 오한을 보냈다. 그 뒤 주인공 아트라하시스가 등장해 에아 신에게 기도를 했고 에아는 오한을 물리칠 방법을 알려준다. 그리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대개 불만이 있는 자들은 갈등을 일으키지만 살 만한 사람들은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 원한다. 그런데 ⟨아트라하시스 이야기⟩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이는 신들이고, 인간들이 현재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기 바란다. 그렇다면 신은 누구이고 인간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김구원 박사는 제임스 호프마이어의 저서 ⟪아켄아텐과 유일신교의 기원⟫ 서평을 실었다. 저자는 직접 텔 엘-보르그를 발굴한 결과를 토대로 아텐 종교가 고왕국 시대의 제5왕조 전통을 회복하려는 시도였고, 아켄아텐의 종교개혁은 그의 종교적 체험을 기초로 발발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과거에 일어난 일은 기록 자료나 고고학 유물로 완벽하게 재구성하기 어렵고, 그것이 과거 사람들의 사상이나 종교적 신념이라면 그 어려움이 배가될 뿐이다. 유일신교의 기원 문제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는다.
그러나 유일신교 신앙을 주창한 사람이 신심과 깨달음이 깊은 수도자나 현인이 아니라 정치 권력의 핵심에 자리한 왕이라면 판단이 좀 쉬워지지 않을까? 왕이란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큰 힘을 유지하기 위해 세밀하게 계획하고 중단 없이 추진하며 절대 후회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가 고백하는 종교적 체험도 거대한 행동 강령의 일부로 평가해야 할 것만 같다.
▪ ⟪한국고대근동학 노트⟫ 제5호를 펴내며 — 편집위원장 윤성덕 · 3
[ 특별 연재 ]
▪ 고대근동의 신상 — 김아리 · 8
▪ 고대 이집트의 예술 ⑤: 고왕국 시대 귀족의 인물상 — 유성환 · 19
▪ 바빌리 사람들의 지혜 ⑤: 샤마쉬 찬양시 ③ — 윤성덕 · 36
▪ 아트라하시스 이야기 ⑤ — 주원준 · 47
[ 고대근동학 리뷰 ]
▪ 아켄아텐의 일신교 개혁의 종교현상학적 배경 — 김구원 · 63
제임스 호프마이어, ⟪아켄아텐과 유일신교의 기원⟫ 서평
학회 신간 안내 · 71
학회 가입 안내 · 72